الأربعاء، 4 سبتمبر 2019

台風15号

平成23年台風第15号(へいせい23ねんたいふうだい15ごう、アジア名:ロウキー〔Roke、意味:男性名、命名国:アメリカ合衆国〕)[1] は、2011年9月13日に発生した台風である
9月13日午後9時 - 日本の南で台風15号となる[1]。
9月15日午後6時 - 南大東島に接近。以後沖縄本島近海で停滞、迷走[2]。
9月19日午後5時 - 大型の台風となる、午後9時 - 強い台風となる。
9月20日午後9時 - 非常に強い台風となる。
9月21日午前 - 紀伊半島が暴風域に
9月21日午後2時 - 静岡県浜松市付近に上陸[3]。
9月21日午後10時 - 福島県大熊町から太平洋に抜ける。
9月22日午後3時 - 千島近海で温帯低気圧に変わる。
9月28日 - 温帯低気圧が気象庁の解析区域である東経180°を超えた後、カナダに到達。
概要
2011年に発生した15個目、日本に上陸した3個目の台風である。 静岡県浜松市では最低海面気圧949.2hPaを観測する[4] など上陸時の中心気圧は950hPaを下回っており、関東地方・中日本に上陸した台風としては戦後最大級の勢力である[5]。

マリアナ諸島の北で発生した熱帯低気圧が徐々に発達し、13日午後9時に日本の南海上で台風となった。その後ゆっくりと発達しながら西に移動し、沖縄本島近海で停滞。3日間かけて、反時計回りの円を描いて海上を一周。その後一時北へ移動した後、北東に進路を変えて速度を速めるとともに、急速に勢力を強めた。21日午後2時過ぎに静岡県浜松市付近に上陸。徐々に勢力を弱めつつ、さらに速度を上げ、東海・関東・東北地方を縦断。同日22時頃に太平洋に抜けた。強い勢力を保ったままさらに北上し、北海道東部を暴風域に巻き込んだ。台風から変わった温帯低気圧は、西高東低型気圧配置の構成要因ともなり、日本海側を中心に雨が残った。22日の夜には温帯低気圧から伸びる前線が関東にかかり、降水となった。また、その冬型の気圧配置により、通常の吹き返しより北西の風が長引いて寒気を引き込んだことにより全国的に低温となり、大雪山で初冠雪を観測した。また、温帯低気圧として、消滅しないままカナダに到達し、風速40m以上の強風・大雨・洪水・倒木・停電・大雪[6] 等の被害が発生した他交通網に影響を与えた。

また、帰宅ラッシュ時と重なる時間帯に台風が上陸したため、関東地方では公共交通機関が軒並み運休となり、東日本大震災以来の多くの帰宅難民が発生した。 10月14日の閣議において、激甚災害指定が決定した。

記録
日本の南海上で複雑な動きをした影響で、長時間にわたって雨が降り続いた。その結果、台風12号と同様に各地で記録的な降水量となった[7]。

徳島市で9月15日から9月22日にかけての総雨量が722.5mm(9月降水量平年値:210.0mm)に達し、24時間降水量、72時間降水量、月降水量の地点記録をそれぞれ更新した[8]。
気象状況
大雨
19日朝から北陸地方や東海地方で雨が降り始め、その後は本州に停滞していた前線の活動も活発となり、台風が通過した21日にかけて東海地方や関東甲信地方を中心に断続的に激しい雨が降り19日09時から21日24時までの総降水量は、各地で300ミリを超え、特に、静岡県静岡市葵区梅ヶ島で554.0ミリ、岐阜県多治見市多治見で496.0ミリを観測した[9]。

1時間雨量
静岡県浜松市天竜区(熊):90.5ミリ(9月21日15時05分まで)[9]
静岡県富士宮市(白糸):69.5ミリ(9月21日15時21分まで)[9]
白糸での統計開始以来の極値を更新した。
日降水量
岐阜県多治見市(多治見宮川):383.5ミリ(9月20日)[9]
静岡県川根本町(川根本町):374.0ミリ(9月21日)[9]
暴風
風は、東海地方や関東甲信地方の沿岸部や伊豆諸島を中心に風速20m/s以上の非常に強い風が吹き、東京都神津島村神津島で31.1m/sを観測した[9]

最大瞬間風速
静岡県御前崎市(御前崎(特)):45.1m/s(9/21日14時34分)[9]
東京都大島町(大島(特)):42.1m/s(9/21日16時00分)[9]
最大風速
東京都江戸川区(江戸川臨海):30.5m/s(9/21日18時25分)[9]
江戸川臨海での統計開始以来の極値を更新した。
被害
10月5日現在、河川や水路に流される、土砂災害に巻き込まれるなどして、16人が死亡し2人が行方不明となっている。また東日本大震災の被災地の岩手、宮城、福島の3県でも死者・負傷者を出した。また、台風の上陸地点となった静岡県や危険半円に位置した神奈川県を始めとする県で多数の負傷者を出した。この年の3月11日に発生した東日本大震災で壊滅的被害が出た東北地方太平洋側でも、震災以後で最大の降水量、冠水を記録。福島第一原発では汚染水の水位が44cm上昇した。山形県では落雷や倒木で一部地域で停電となった。震災被災地では居住地での浸水被害はあったものの、低地に建築規制がかけられていた地区も多かったことから被害は軽減された。

土砂災害
9月21日、静岡県静岡市において住宅が巻き込まれて1人が死亡したほか、岐阜県御嵩町においても走行中の車両が巻き込まれて1人が死亡した[10]。22日には、岩手県二戸市において1人が死亡、震災被災地の宮城県仙台市宮城野区や新潟県佐渡市などにおいても発生した[11][12]。

強風
21日、神奈川県相模川に架かる3つの橋では、トラックなど8台が相次いで横転した[13]。千葉県富津市では円柱形の鋼材4基が倒壊し、2基が変形した[14]。神奈川県川崎市川崎港では、停泊中の貨物船2隻が浅瀬に乗り上げた[15]。また、神奈川県横浜市では強風にあおられて転倒し1人が死亡している[10]。

その他
9月16日、高知県南国市で増水した用水路に流されて1人が行方不明となった[16]。

影響
交通
鉄道
東海地方から東北地方の多くの路線で運転を見合わせるなどの乱れが発生した[17]。

JR東日本は、「台風が直撃する進路をとっており、駅間停車などの輸送障害を事前に避けるため」という理由で風速計や雨量計が規制値を超えていなかった山形新幹線・東北新幹線・秋田新幹線でも、一部列車・区間の運休を決めた。このような「計画運休」は、2009年(平成21年)10月の台風18号以来となる。 東海道新幹線が昼過ぎから運転を見合わせ、多数の区間で停電や倒木が発生し多数の列車が運休したり、8時間遅れで運行した列車もあった。

静岡県と山梨県を結ぶ身延線の西富士宮駅 - 甲府駅は、内船駅 - 甲斐大島駅間の盛土が崩壊したほか各地で土砂流入や倒木などが発生し、不通となった。身延駅 - 甲府駅間は9月26日から、西富士宮駅 - 内船駅間は11月14日からそれぞれ運転を再開[18]。被害が甚大な身延駅 - 内船駅間は2012年3月16日まではバス連絡輸送を行ない、翌17日に全線復旧した[19]。

航空
21日には国内線・国際線合わせて成田空港発着便を中心に500便以上が欠航となった[17]。

道路
高松自動車道では板野ICの東方でのり面の崩落が見つかり、同ICと鳴門ICの間が通行止めとなっている。

農業
青森県では17日からの大雨で五所川原市などでリンゴ園が浸水した[20]。

スポーツ
サッカー
日本フットボールリーグは台風の接近に伴って9月18日に行われる1試合の中止を決定した[21]。

競馬
笠松競馬・船橋競馬は9月21日に予定していたレースを中止した[22]。

プロ野球
9月21日の東京ドーム、神宮球場、Kスタ宮城、西武ドームで開催予定の試合が台風の影響で中止された[23][24]。なお、同日の京セラドーム大阪の試合は通常通り開催。

競輪
川崎、大垣、松阪の各競輪場で予定されていた開催が中止・順延になった他、場外発売にも影響が出た[25]。

停電
静岡県(富士川以西)では26万8千戸以上が停電した。特に台風の進路にあった静岡県西部地域(浜松市を中心に)は停電戸数が多く、復旧に時間が掛かった[26]。
静岡県島田市では、倒木の影響で電線が切断されて大規模な停電が発生。その他にも東海地方・関東地方を中心に停電が相次いだ[27]。

学校
台風12号で被災した三重県立紀南高等学校では、学校再開が遅れ、9月20日にようやく再開を果たしたが、その日の午後には台風15号に伴い大雨警報が発表され、翌9月21日には暴風警報と紀勢本線の代行バスが運休になったことから、再開から1日で再び休校となった[28]。同校は創立50周年を迎え、記念式典が10月に予定されていたが、翌2012年に延期、文化祭(紀南高祭)は中止が決まった[28]。

その他
9月15日、種子島宇宙センターから打ち上げる予定だったH2Aロケット19号機の打ち上げを延期[29]。
9月16日、南西石油は台風の接近に伴って海洋事業の操業を中止した[30]。
せき止め湖
「平成23年台風第12号#せき止め湖」も参照
台風12号によって天然ダムが発生した奈良県と和歌山県では、大雨によりダムの水位が上昇し、決壊の危険性が高まっている。 9月20日午後には、和歌山県田辺市熊野(読み方はいや)では、土砂が水位より高くなっているが、決壊したという情報はない[31]。

新燃岳
大雨によって新燃岳の噴火による土石流の危険性が高まったことで、宮崎県都城市では20日、一部住民に避難勧告を出した

旭日旗

旭日旗(日语:旭日旗/きょくじつき Kyokujitsu-ki)是带有红日和旭日光芒图案的一种旗帜,是日本军所采用的軍旗。原日本海軍旭日旗现在依然用於日本海上自衛隊。

旭日旗今日有着政治含义。由于旭日旗是旧日本军使用的旗帜,故有時被日本於二次世界大戰期間曾侵略的地区(如南韓、朝鮮半島、東南亞等)視為冒犯性的图案和日本軍國主義的象徵,在中国和朝鲜半島,因二战期间的日军战争罪行,旭日旗受到当地的批判和抵制,日本在海上自衛隊成立後,是否仍用此海軍旗幟的時候也有過爭論。
大日本帝國陸軍联队旗
太阳居中的旭日旗——也即大日本帝國陸軍的“联队旗”,是在联队(團級部隊)编成时由天皇赐与的,是联队的象征。联队旗除了是所谓“联队团结”的象征之外,更是天皇神格化的象征。

天皇在宫中将军旗授予新成立联队的联队长时,照例发表如下的敕语:“兹宣布步兵第XX联队建制完成。尔等军人必须协力同心,以宣扬武威,保卫国家。”然后,联队长宣誓:“谨奉明敕。臣等定将尽死力,誓死保卫国家。”依据明治宪法规定,军队的指挥权、统率权属于天皇。而天皇亲授的军旗乃是代表天皇的旗帜,联队长以下全员必须对军旗致以最高敬礼。

因此,日军官兵对军旗的敬重达到登峰造极的地步:行军时,军旗装在旗套之中;而在正式的操典之时,擎出的是象征军旗的旗杆、旗冠与流苏。由於聯隊旗不會有另一面,因此不容許老化及修理,和普通的軍旗不同。战时日军的新闻检查制度曾明确规定,军旗不能在报刊上公开出现。随着日本战败,联队旗被废止,爾後成立的陆上自卫队亦使用经过重新设计的军旗
战后
在日本接受波茨坦宣言以后,大日本帝國海軍解体,同时日本的军舰旗亦不复存在。其后,随着警备队的创立,1952年(昭和27年)“警备队旗”(白地的中央加上红色的樱花(サクラ),加上蓝色的7个横间)制定。後來于1954年(昭和29年)6月《自卫队法施行令》(昭和29年政令第179号)制定为与帝国海军同样规格的“自卫舰旗”。

自卫舰旗是根据自卫舰旗授与式由内阁总理大臣授予,而舰只除籍后或改成支援船的区分变更的时候需要归还。自卫舰旗与陆军的军旗(联队旗)在很多相似的地方,但在国际法上,自卫舰旗的主要功能是表示国籍,而聯隊旗是在編成時由天皇賜與的,是聯隊的象徴。由於聯隊旗不會有另一面,因此不容許老化及修理,和普通的軍旗不同。軍艦旗是消耗品,在艦内通常有多面備用,並要經常在當眼的地方懸掛。同時,不像軍旗需要在戰鬥中特別保護,因此在砲火攻擊下一轉眼就可能消失。但如果軍艦旗在戰鬥中損傷,在盡可能的情況快速更換即可。

使用
一般操作上,日章旗(日本国旗)悬挂在舰首,而旭日旗悬挂在舰艉。按惯例,船只航行中舰首不悬挂旗帜,故在舰尾悬挂旭日旗以示国籍。

日本海上自衛隊禮式規則(昭和40年5月24日海上自衛隊達第33號)第21條(自衛艦旗懸掛及下降的場合),自衛艦需要定時懸掛及降下自衛艦旗,在指定時間10秒前以喇叭號令「注意(気を付け)」及後演奏一次國歌君之代(海上自衛隊與帝國海陸兩軍的喇叭譜相同,卻不同於陸上自衛隊及航空自衛隊使用的君之代樂譜),位於後甲板付近的艦橋上的當值士官需要對自衛艦旗舉手敬禮。艦橋及露天甲板的人,亦需要向自衛艦旗舉手敬禮,而其他地方的人需以立正姿勢敬禮。在岸上的海上自衛官如目睹自衛艦旗懸掛及降下,應停止動作,向該自衛艦旗敬禮。音樂隊乘坐的自衛艦,並與外國軍艦同時停泊,在定時懸掛及下降自衛艦旗並演奏「國歌」後,需以外國軍艦的首席指揮官的先任順序逐次向該國演奏其國歌1次。但在外国的港灣停泊時,需先演奏該國的「國歌」。自衛艦與外國軍艦同時停泊,在定時的懸掛及下降自衛艦旗的時候,如聽到外國軍艦演奏「國歌」,又或自衛艦演奏外國的國歌,艦橋及露天甲板的人需向自衛艦旗或該國的軍艦旗舉手敬禮,其他地方的人需起立及以立正姿勢敬禮。懸掛方式上,海上自衛隊與外國的海軍基本基本相同。關於海上自衛隊自衛艦旗相關的禮式,參考海上自衛隊之禮式。

同時,軍艦以外的船舶,對軍艦表示敬意時將懸掛的國旗半下敬禮(半旗)是通例。接受的軍艦半下軍艦旗還禮,其後,用信號旗打出「祈願航行安全」的訊息

디플레이션

디플레이션(영어: deflation)이란 한 국가의 경제에서 재화와 용역의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물가의 하락을 의미한다. 디플레이션은 일반적이고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경제상 거래에서 사회적으로 통산 필요되는 양 이하로 통화가 수축하여, 그 까닭으로 화폐의 가치가 상승한다. 즉 물가가 하락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인플레이션과는 정반대의 상태이다.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에의 통화적 대책으로서의 재정자금의 인상, 재할인율의 인하, 판매 오퍼레이션 등의 결과가 일어난다. 이와 같은 디플레이션은 의도적인 정책에 의한 것이므로 차츰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과잉생산으로 인한 불황도 디플레이션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임금이나 물가는 내리는 방향으로는 변동이 어려운 경향이 있으므로 자연적으로 디플레이션의 상태가 나타나는 일은 드물다. 디플레이션 때에는 기업의 도산이 늘고, 전체적인 기업활동은 정체하고, 생산의 축소가 이루어진 결과 실업자가 증대한다. 또 임금이나 봉급의 지배(遲配, 지급을 늦춤)·결배(缺配, 지급을 하지 않음)나 절하(액수를 낮춤)의 사태도 야기될 수 있다. 한편에서는 중소기업의 경영 악화에 편승하여 대기업으로 흡수 합병이 이루어지고 독점적 지배가 강화되기 쉽다

로저 페더러

로저 페더러(독일어: Roger Federer, 1981년 8월 8일 ~ )는 스위스의 프로 테니스 선수이다. 2004년부터 2008년까지 237주 연속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하여 역대 최장 연속 랭킹 1위 기록을 세웠으며,[2] 현재 305주간 세계 랭킹 1위를 기록하고있다. 그는 많은 스포츠 전문가들과 비평가들, 전·현역 선수들에 의해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다.[3][4][5][6][7]

페더러는 남자 테니스와 관련해 많은 세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역대 남자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총 20개의 그랜드 슬램 단식 타이틀을 획득했다. 또한 그는 2009년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역대 7번째 남자 선수가 되었다. 그는 역대 남자 선수들 중 가장 많은 총 30회의 그랜드 슬램 결승에 진출했다. 또한 2004년 윔블던 우승을 시작으로 2010년 1월 호주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약 6년에 걸쳐 그랜드 슬램 준결승 23회 연속 진출을 기록, 이 부문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이는 종전 최고 기록보다 두 배 이상 많은 것이었다.[8] 그가 선수 생활동안 이뤄낸 뛰어난 성적들과 기록들을 인정받아 그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 연속 로레우스 올해의 세계 스포츠인상을 수상하였다
생애
페더러는 스위스 바젤 근처의 비닝겐에서 스위스 출신의 로버트 페더러(Robert Federer)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리네트 뒤 랑(Lynette Du Rand)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9]

그는 바젤 교외에 있는 뮌헨스타인에서 자랐으며, 이 지역은 프랑스와 독일 국경에서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9] 그는 집에서 가족과 대화할 때에는 스위스식 독일어를 사용하고 독일어와 프랑스어, 그리고 영어 또한 유창하게 구사하며[10], 기자회견을 진행할 때에도 이 세 가지 언어를 모두 사용한다.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로 자라난 그는 2006년 로마 마스터스 대회 당시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알현하기도 하였다.[11]

그는 어린 시절 테니스 선수가 되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축구를 함께 배웠으며, 축구 또한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을 고려할 정도로 출중한 기량을 보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그의 고향 축구 클럽인 FC 바젤의 열렬한 팬이다. 그는 크리켓 팬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2006년에는 2004년 인도양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쓰나미 피해로 난민이 된 타밀나두의 어린이들과 크리켓 경기를 갖기도 했다.[12]

페더러는 다양한 자선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003년에 그는 빈민층을 돕고 스포츠의 보급을 장려하기 위하여 로저 페더러 재단[13] 을 설립하였다. 2005년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들을 돕기 위하여 2005년 US 오픈에서 사용되었던 그의 라켓을 경매에 내놓기도 하였다. 그는 2006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되어 남아프리카 공화국 및 타밀나두를 방문하였다. 그는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하는 유니세프의 광고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2007년 그는 사진작가 애니 리보비츠와 함께 아서 왕 컨셉의 화보를 촬영하였다. 이것은 디즈니에서 주관한 '백만 가지 꿈의 해'(Year of a Million Dreams)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던 유명 인사들의 화보 시리즈 중 하나로 제작된 것이었다. 스위스 체신부는 로저 페더러의 스포츠계에서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 우표를 제작하였다.[14][15]

모든 스위스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페더러도 병역의 의무를 갖고 있었으나, 2003년 그가 등 쪽에 오랜 기간 갖고 있었던 질환으로 인해 병역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적합치 않다는 판정을 받아 병역이 면제되었다.[16]

결혼
페더러는 2009년 4월 전 여자 프로 테니스 선수이자 그의 오랜 연인이었던 미르카 바브리넥과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테니스 종목 스위스 국가대표로 함께 출전하면서 만나게 되었다. 바브리넥은 고질적인 발 부상 때문에 2002년 투어에서 은퇴하였고 이후 페더러의 홍보 매니저 역할을 담당하였다.[17] 오랜 연인 관계를 지속하던 이들은 2009년 3월에 페더러의 홈페이지를 통해 바브리넥의 임신을 발표하였으며[18], 이후 두 사람은 2009년 4월 11일 바젤에서 가까운 친척들과 친구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19] 2009년 7월 24일, 페더러는 자신의 페이스북 홈페이지를 통해 두 쌍둥이 딸 밀라 로즈(Myla Rose)와 샤를렌 리바(Charlene Riva)가 7월 23일에 탄생했음을 알렸다.[20]

선수 경력
주니어 시기
페더러는 6세 때 처음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다.[21] 9살이 되면서 그룹 레슨에 참가하기 시작했으며, 그 이듬해부터는 개인 레슨을 시작했다. 그는 테니스 선수가 되기로 결정했던 12세 전까지는 축구 또한 함께 배웠다.[22] 14세 때는 스위스의 그룹 통합 주니어 챔피언이 되었으며 에쿠블렌스에 있는 스위스 내셔널 테니스 센터에서 트레이닝을 받을 주니어 선수로 선정되었다. 1996년부터 ITF 주니어 테니스 서킷에 참가하기 시작[23] 한 그는, 주니어 선수로 활동한 마지막 해였던 1998년에 윔블던 주니어 타이틀 및 가장 권위있는 주니어 대회 중 하나인 연말 오렌지 보울 타이틀을 획득했다.[24]

1998–2002년: ATP 투어 데뷔 초기
페더러는 1998년 크슈타드에서 그의 ATP 투어 데뷔 첫 경기를 치렀다. 이 경기에서 그는 아르헨티나의 루카스 아놀드 커에게 0-2로 패했다. 같은 해에 그는 두 개의 대회에 더 참가하기는 했으나, 당시 그가 치른 대부분 경기의 수준은 아직 주니어 레벨에 머물러 있었다.[25]

1999년 4월 그는 이탈리아와의 데이비스 컵 경기에 스위스 국가대표로 출전하였다.[26] 또한 프랑스 오픈에 참가하면서 생애 최초의 그랜드 슬램 대회 경기를 치렀으나, 1회전에서 패트릭 라프터에게 4세트만에 패했다.[25] 윔블던에서도 와일드카드를 받아 생애 첫 출전을 하였으나, 1회전에서 당시 랭킹 59위이던 체코의 지리 노박에게 5세트 끝에 패했다.[25] 세계 랭킹 66위로 시즌을 마감하였다.[27] 이때 당시 그는 랭킹 100위권 안에 든 가장 어린 선수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호주의 레이튼 휴이트와 팀을 이루어 복식에도 출전하여 16강까지 진출, 팻 라프터(Pat Rafter)와 요나스 비요크만에게 5세트 접전 끝에 패했다. 2000년 1월에는 생에 첫 호주 오픈에 출전하여 3회전에서 당시 세계 랭킹 49위였던 프랑스의 아르노 클레망에게 패했다.[28] 같은 해 생애 처음으로 출전한 US 오픈에서도 그는 3회전까지 진출하여 당시 랭킹 12위였던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에게 패하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한 그는 마르세유에서 열린 ATP 투어 대회에서 생애 최초로 결승에 올랐으나 같은 스위스 선수였던 마크 로세트에게 패하였고, 그의 고향 바젤에서 열린 대회에서도 준우승하였다. 한편 이 해 호주에서 열린 호프만 컵에도 스위스 대표로 참가했던 그는 결승에서 미국의 잔 마이클 갬빌을 3-0으로 꺾기도 했다. 비록 눈에 띄는 성적을 내지는 못하였지만, 2000년은 페더러가 처음으로 한 해에 4개 그랜드 슬램 대회에 모두 참가한 해였다. 그는 2000년 연말 세계 랭킹 29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페더러는 2001년 2월 밀라노 인도어 대회에서 프랑스의 줄리앙 보테르를 꺾고 우승하면서 생애 첫 ATP 타이틀을 획득했다.[29] 같은 달 열린 미국과의 데이비스 컵 경기에서 그는 세 경기에 출전하여 승리함으로써 스위스가 미국을 3-2로 꺾는 데 공헌하였다. 이 해 프랑스 오픈에서 그는 8강에 진출하였으며, 15번 시드로 출전한 윔블던에서도 역시 8강까지 진출하였다. 특히 4회전에서는 윔블던 7회 우승자였던 피트 샘프라스를 만나 7-6(7), 5-7, 6-4, 6-7(2), 7-5로 승리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샘프라스가 페더러에게 패함으로써 그가 갖고 있던 윔블던에서의 연승 기록도 31연승으로 끝나게 되었다.[30] 그는 랭킹 13위로 2001년 시즌을 마감하였다.

2002년 페더러는 플로리다주에서 열린 나스닥-100 오픈 결승에 진출하면서 생애 첫 ATP 마스터스 시리즈 결승에 진출하였으나, 결승에서 안드레 애거시에게 패하면서 우승에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후 열린 함부르크 마스터스에서 우승하면서 그의 생애 첫 마스터스 시리즈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또한 러시아와의 데이비스 컵 경기에서 단식 경기에 출전, 전 세계 랭킹 1위였던 마라트 사핀과 예브게니 카펠니코프를 꺾었다. 그러나 이 해 프랑스 오픈, 윔블던, 그리고 US 오픈에서는 본선 초기에 탈락하고 말았다. 한편 그와 오랫동안 함께해왔던 호주 출신의 코치이자 멘토였던 피터 카터(Peter Carter)가 8월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페더러는 한동안 큰 상실감에 빠지기도 했다고 알려진다.[31] 페더러의 2002년 연말 랭킹은 6위였다.[32] 9월까지 13위였던 그의 랭킹은 10월 중순께 7위까지 뛰어올랐다.[33] 이 덕분에 그는 상위 랭커 8명이 출전하는 연말 마스터스 컵 대회에 생애 처음으로 참가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해 대회 우승자가 되었던 호주의 레이튼 휴이트와의 준결승 경기에서 패하였다.

2003년
1월에 열린 호주 오픈에 참가한 페더러는 4회전에서 다비드 날반디안에게 패했다. 이후에 열린 하드 코트 대회인 마르세유 오픈과 두바이 테니스 챔피언십에서는 모두 우승했다. 그러나 ATP 마스터스 시리즈 대회인 인디언 웰즈 마스터스와 마이애미 마스터스에서는 초반에 탈락했다.

이후에 시작된 클레이 코트 시즌에서 그는 BMW 오픈에서 우승했으며 마스터스 시리즈 대회인 로마 마스터스와 함부르크 마스터스에서는 각각 준우승 및 3회전 진출의 성적을 거두었다. 프랑스 오픈에서 그는 5번 시드를 배정 받아 출전했지만 1회전에서 루이스 오르나에게 패해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 출전한 두 개의 잔디 코트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면서 페더러는 이 해 잔디 코트 경기 무패를 기록했다. 첫 번째는 게리 웨버 오픈에서 결승에서 니콜라 키퍼를 꺾고 우승한 것이었으며, 두 번째는 윔블던 결승에서 마크 필리포시스를 누르고 승리하면서 생애 최초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따낸 것이었다. 이 해 윔블던에서 그는 3회전 마디 피시와의 경기에서 1세트를 내준 것 외에는 무실세트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시작된 북미 여름 하드 코트 시즌 대회에서 그는 마스터스 시리즈 대회인 로저스 컵 준결승에서 앤디 로딕에게 패했다. 이전의 윔블던 준결승에서 앤디 로딕을 만났을 때는 페더러가 3-0으로 승리했던 바 있다. 또 다른 마스터스 시리즈 대회인 신시내티 마스터스와 US 오픈에서는 모두 2회전에서 다비드 날반디안에게 패했다.

가을 시즌에 페더러는 유럽 지역에서 열린 4개의 인도어 대회에 연이어 출전했다. 그리하여 BA-CA 대회에서는 우승했으며, 나머지 3개의 대회인 다비도프 스위스 인도어, 마드리드 마스터스, 파리 마스터스에서는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그해 연말 마스터스 컵 대회에 3번 시드로 출전한 그는 생애 최초로 연말 챔피언십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는 예선 라운드 로빈 리그전에서 안드레 애거시, 다비드 날반디안,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를 꺾었으며, 준결승에서는 당시 세계 랭킹 1위였던 앤디 로딕을, 그리고 결승에서는 안드레 애거시를 꺾으며 전승으로 우승했다. 2003년 연말 페더러의 최종 랭킹은 세계 랭킹 2위였다. 1위는 로딕, 3위는 페레로였다.[34]

2004년
페더러는 2004년 한 해동안 매우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그의 이 해 성적은 오픈 시대 전체를 통틀어서도 매우 탁월한 수준이었다.[35] 그는 2004년에 4개 그랜드 슬램 대회 중 프랑스 오픈을 제외한 3개 대회에서 우승하였고, 세계 랭킹 10위권 이내의 선수에게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으며, 결승에 진출한 대회에서는 모두 우승했고, ITF 테니스 세계 챔피언의 칭호까지 얻었다.[36] 한 해 총 전적은 74승 6패였고, 그랜드 슬램 대회 3개 및 ATP 마스터스 시리즈 대회 3개를 포함해 총 11개 대회에서 우승했다.

1월에 열린 호주 오픈에서는 결승에서 마라트 사핀을 3-0으로 꺾으면서 생애 첫 호주 오픈 우승컵을 거머쥐었다.[37] 이 우승으로 그는 앤디 로딕을 제치고 생애 처음으로 세계 랭킹 1위에 올라섰다. 그는 이후 2008년 8월 18일까지 237주(약 4년) 동안 세계 랭킹 1위를 지켰으며, 이것은 남녀 선수를 통틀어 역대 최장 '연속 세계 랭킹 1위' 기록이다.

3월에는 두바이 테니스 오픈 결승에서 스페인의 펠리시아노 로페스를 누르고 우승했다.[37] 일주일 후 열린 인디언 웰즈 마스터스에서는 팀 헨만을 꺾고 우승했다.[37] 마이애미 마스터스에서는 라이벌 라파엘 나달과 처음으로 맞닥뜨렸으며, 페더러가 나달에게 패했다. 페더러는 독일에서 열린 게리 웨버 오픈에서 우승했으며, 이어 역시 독일에서 개최된 함부르크 마스터스에서도 세계 랭킹 4위의 기예르모 코리아를 꺾고 이 대회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다.[37] 당시 코리아는 페더러에게 패하기 전까지 클레이 코트 경기 31연승 기록을 이어오고 있었다.

페더러는 이 해 프랑스 오픈에 1번 시드로 출전했으나 3회전에서 이 대회 3회 우승자인 구스타보 쿠에르텐에게 패했다. 이후 윔블던에서는 결승에서 앤디 로딕을 꺾으면서 지난 해에 이어 또 다시 우승컵을 안았다. 그리고 US 오픈에서는 결승에서 호주의 레이튼 휴이트를 6–0, 7–6(3), 6–0으로 가볍게 꺾으면서 생애 첫 US 오픈 타이틀을 획득했다. 그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테니스에 톱시드로 출전하였으나 2회전에서 체코의 토마시 베르디흐에게 패해 탈락했다. 연말 마스터스 컵에서는 결승에서 레이튼 휴이트를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기록했다.

2005년
2005년 초 페더러는 호주의 유명한 테니스 선수 출신 코치인 토니 로체를 제한적인 역할의 코치로 영입했다.[38] 호주 오픈 준결승에서 페더러는 이 해 대회 우승자가 된 마라트 사핀을 만나 5–7, 6–4, 5–7, 7–6(6), 9–7로 패했다.[39] 그러나 이후 인디언 웰즈 마스터스에서 레이튼 휴이트를 3-0으로 꺾고 마이애미 마스터스에서 라파엘 나달을 5세트만에 2–6, 6–7(4), 7–6(5), 6–3, 6–1으로 꺾으면서 두 개의 ATP 마스터스 시리즈 타이틀을 추가했다. 특히 마이애미 마스터스 결승에서는 나달에게 두 세트를 먼저 내주고 매치 포인트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극적인 역전극을 펼쳤다. 5월에 열린 클레이 코트 대회인 함부르크 마스터스 결승에서는 프랑스의 리샤르 가스케를 누르고 우승했다. 페더러는 이 대회 전에 몬테카를로 마스터스 8강에서도 가스케를 만났었는데, 이 때는 페더러가 패했던 바 있다. 이후 열린 프랑스 오픈에서는 준결승에서 4번 시드였던 나달을 만나 4세트만에 패했다. 나달은 이해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했다.

윔블던 결승에서는 전년도 결승에서도 만났던 앤디 로딕을 상대로 3세트를 내리 따내며 승리, 3년 연속 우승을 기록했다. 페더러는 이후 신시내티 마스터스 결승에서도 로딕을 만나 또 한 번 승리하면서 이 해 4번째 마스터스 시리즈 우승을 기록했다. 이로써 페더러는 2005년 북미 지역에서 열린 마스터스 시리즈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으며, 한 해에 4개 마스터스 시리즈 대회에서 우승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40] US 오픈 결승에서는 안드레 애거시를 4세트만에 꺾으면서 우승했는데, 특히 1회전에서 준결승까지의 모든 경기에서 단 두 세트만을 잃었을 정도로 탁월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페더러는 한 해에 윔블던과 US 오픈에서 모두 우승하는 것을 2년 연속으로 달성한 오픈 시대 이래 최초의 남자 선수가 되었다.

한편 시즌 마지막 마스터스 시리즈 대회인 파리 마스터스 결승에서는 4시간 반에 걸친 5세트 접전 끝에 아르헨티나의 다비드 날반디안에게 패하여 타이틀 방어에 실패했다.[41] 이로 인해 직전까지 이어 오고 있던 결승 경기 24연승 기록도 멈추게 되었다. 만일 페더러가 이 경기에서 승리했다면 존 매켄로가 1984년 기록한 오픈 시대 이래 시즌 최고 승률 기록(82승 3패)과 타이를 이룰 수 있었다.

김철민

김철민(金哲玟, 1957년 2월 15일 전라북도 진안군 ~ )은 대한민국의 기초단체장으로 민선5기 경기도 안산시장을 맡았었다. 2016년 4.13 20대 총선에서 안산 상록구 을 지역구에 나와 현 지역구 의원이였던 국민의당 김영환 의원과 새누리당 홍장표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김철민은 20대 총선을 통해 처음으로 국회의원으로써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다
학력
1963 ~ 1969 대전중앙초등학교 졸업
1969 ~ 1972 대전중학교 졸업
1972 ~ 1974 경동고등학교 3년 중퇴
1975 고등학교졸업자격 검정고시
1981 ~ 1991 한밭대학교 건축공학 학사
2006 ~ 2008 한양대학교 경영학 석사
경력
민주당 지방자치위원회 부위원장
민주당 경기도당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장
민주당 안산상록을 지역위원장 직무대행
안산종합건축사사무소 대표
안산시건축사협회 회장
상록신용협동조합 이사장
안산시육상경기연맹 회장
안산중앙라이온스클럽 회장
국제라이온스클럽 354B지구 부총재
경희대학교AMP 안산총동문회 회장
안산시호남향우회 회장
안산상록경찰서 선진질서위원회 위원장
2010.07.01 ~ 2014.06.30 : 제12대 민선 5기 경기도 안산시장
2012.11.07 ~ 제1대 전국다문화도시협의회 회장 역임
2013.01.01 ~ 제7대 경기중부권행정협의회 회장 역임
2016년 5월 ~ : 제20대 국회의원 (경기 안산시 상록구 을, 더불어민주당)
2016.06 ~ 2018.05: 제20대 국회 전반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
2018.07 ~ : 제20대 국회 후반기 국토교통위원회 위원
전과
건축법위반: 벌금 500만원 - 1998년 8월 14일 선고[2]
도로교통법위반(음주운전): 벌금 150만원 - 2000년 3월 31일 선고[2]
건축법위반: 벌금 700만원 - 2000년 8월 18일 선고[2]
교통사고처리특례법위반, 도로교통법위반(음주운전): 벌금 300만원 - 2002년 11월 12일 선고[2]
수상
2013 전국기초단체장 메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 우수
2013 한국메니페스토실천본부 전국기초단체장 공약이행 및 정보공개평가 최우수
2012 전국기초단체장 메니페스토 우수사례 경진대회 우수
2012 한국메니페스토실천본부 전국기초단체장 공약이행 및 정보공개평가 최우수
2011 한국메니페스토실천본부 전국기초단체장 공약실천계획서 평가 2개부문 최우수
2001 경기도지사 표창

정재홍

정재홍(鄭在洪, 1986년 1월 26일 ~ 2019년 9월 3일)은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이다. 2008년 KBL 드래프트에서 전체 6순위로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에 지명되었다. 갑작스런 심정지로 인해, 2019년 9월 3일 향년 33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학력
신흥초등학교
송도중학교
송도고등학교
동국대학교
경력
2008년 ~ 2017년 : 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2008년 드래프트 1라운드 6순위)
2010년 ~ 2012년 : 국군체육부대
2013년 ~ 2015년 :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임대)
2017년 ~ 2019년 : 서울 SK 나이츠

동양대학교

동양대학교(東洋大學校, Dongyang University)는 경상북도 영주시와 경기도 동두천시에 있는 사립 대학이다. 학교법인 현암학원 소속으로, 최현우가 설립했다.
연혁
1994년 3월 1일 동양공과대학교 개교
1996년 3월 1일 '동양공과대학교’를 ‘동양대학교’로 교명 변경
1998년 8월 24일 동양대학교 방송국(DBS) 개국
200년 2월 26일 ‘00 대학종합평가 교육우수, 시설설비 최우수대학 선정 (대교협)
2001년 2월 28일 인문사회과학관 준궁
2001년 8월 17일 ‘01 교육개혁 최우수대학으로 선정(교육부)
2002년 11월 18일 '02학년도 지방대학육성사업 우수대학 선정(교육인적자원부)
2003년 8월 21일 '03 특성화우수대학 선정(교육인적자원부)
2007년 3월 8일 213학군단 창설
2013년 교육부 선정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2]
2016년 4월 1일 동두천시 반환미군기지에 북서울캠퍼스 설립
2018년 : 교육부 대학기본역량진단평가 결과 역량강화대학 선정 및 조건부 일반재정지원[

زياد علي

زياد علي محم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