الجمعة، 30 أغسطس 2019

류현진

류현진(柳賢振, 1987년 3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야구 선수이자 메이저 리그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투수이다. KBO 리그에서 메이저 리그로 직행한 첫 번째 한국인 선수이다.

아마추어 시절
인천창영초등학교와 동산중학교를 거쳐 동산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동산고 1학년 때인 2003년에 제1회 미추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출전, 예선 3경기에서 평균자책 0.00점을 기록하며 동산고등학교의 준우승에 기여하였다.[1] 동산고 2학년 초인 2004년에는 팔꿈치 부상으로 토미 존 수술을 받아 1년 동안 재활에 매진했다. 3학년인 2005년에는 제60회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에 출전. 8강전인 성남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는 삼진 17개를 잡으면서 완봉승을 거두었고,[2] 1966년 이후 39년 만에 동산고등학교의 6번째 청룡기 우승을 일구어 내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53과 2/3이닝 동안 6승 1패 방어율 1.54) 2006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에서 당시 SK 와이번스의 연고지인 인천, 경기, 강원 지역의 Big 3은 동산고등학교 투수 류현진, 인천고등학교 포수 이재원, 인천고등학교 투수 김성훈이었다. 이 중 류현진이 가장 뛰어났기에 당연히 인천광역시 연고 팀 SK 와이번스가 1차 지명에서 류현진을 선택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SK 와이번스는 인천고등학교 포수 이재원을 선택했다. 당시 SK 와이번스가 포수 자원을 필요로 했고 1년 뒤 SK 와이번스가 연고권을 가진 안산공고 좌완 투수 김광현을 안전하게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류현진이 동산고등학교 시절 토미 존 수술을 받은 전력이 있어 다른 구단에서 지명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2차 1라운드 지명에서 전체 4순위 지명권을 가진 SK 와이번스가 류현진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그리하여 류현진은 2차 지명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2차 지명에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구단은 롯데 자이언츠였기에 류현진이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할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이와 달리 롯데 자이언츠는 나승현을 지명했고, 전체 2순위 지명권을 가진 한화 이글스가 류현진을 지명했다. 이는 한화 이글스 신인 드래프트 역사상 최고의 스카우트로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SK 와이번스는 전체 4순위 지명에서 Big 3 중 남은 한 명인 김성훈을 지명했다.

KBO 리그 시절
한화 이글스 시절
입단 당시 등번호는 15번이었으나, 한화 이글스에서 15번을 달고 오랜 기간 활동했던 투수 구대성이 미국 메이저 리그 뉴욕 메츠에서 한화 이글스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99번으로 변경되었다. 그 때 그는 별 생각 없이 99번으로 변경했으나, 이후에는 소속 팀의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의 재현을 위해 99번을 고수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재현하지 못했다고 한다.[3] 2006년 프로 야구 데뷔 첫 해 데뷔하자마자 다승왕(당시 선발로만 18승을 거두었는데 역대 순수신인 선발 최다승), 최다탈삼진, 평균자책 부분 1위로 투수 3관왕에 오르며 신인왕과 최우수 선수상을 프로야구 사상최초로 동시에 석권했는데 86년 선동열[4] 2005년 손민한[5]이 기록한 종전 역대 정규시즌 MVP 최다 선발승(17선발승)을 갱신했으나 2007년 리오스 (22선발승)[6]에 의해 깨졌으며 85년 김일융, 95년 이상훈의 좌완 최다 선발승(20선발승) 타이 기록[7]에 2승이 모자라기도 했다. 신인이라고 하기엔 믿기 힘든 뛰어난 활약으로 '괴물'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데뷔 첫 해 한국시리즈에도 등판하였다. 뛰어난 활약을 바탕으로 2006년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에 선출되기도 했다.

2007년에는 2년차 징크스를 우려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17승을 거두고 2년연속 최다탈삼진 타이틀을 획득하는 등 여전히 압도적인 구위를 보였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본선에 국가 대표로 참가해 예선전인 캐나다전과 결승전인 쿠바전에 선발 등판했다. 캐나다전 완봉승[8] 을 포함, 17 1/3 이닝을 던져 2승0패, 평균 자책 1.04, 13탈삼진의 뛰어난 성적으로 금메달 획득에 기여하며 병역도 해결하였다.[9]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참가했다. 2009년 3월 6일 벌어진 아시아 라운드 첫 경기 대만전에 선발로 등판하여, 3이닝을 1피안타, 3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승리를 거두었다.[10] 류현진은 이 대회에서 주로 중간계투로 출전해 1승0패 방어율2.57을 기록하며 WBC준우승에 기여하였다.

2010년 정규리그 투수 트리플 크라운이 유력할 정도로 압도적인 시즌을 보냈지만 시즌 막판에 부상을 당하며 이탈하고 만다. 결국 다승왕을 구원으로 1승을 추가한 김광현에게 내주며 아쉽게도 2관왕에 머물렀다. 그렇지만 스포츠토토 올해의 투수상, 조아제약 최고 투수상, 골든글러브 상, 최다탈삼진 상, 최우수 평균자책점 상, 한경기 정규이닝 최다탈삼진 상등 수많은 상을 획득하며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투수임을 입증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로도 출전하였으며 대만과의 결승전에서 선발로 등판해 철벽 마운드를 구축,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 공헌했다.

2011년 개인통산 1000탈삼진을 달성했다. 그러나 부상으로 시즌 도중 이탈하며 공백이 있었다.

2012년 류현진은 불운한 한 해를 보냈다. 한화 이글스 타자들의 심각할 정도의 부진과 야수들의 형편없는 수비로 류현진을 제외한 모든 한화 선수들은 큰 질타를 받았다. 10승을 위해 등판한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홀로 10이닝을 책임지며 7회 초, 강정호에게 맞은 솔로홈런 이외에 별다른 실점없이 1실점으로 호투하였다. 그럼에도 노 디시전으로 경기가 마무리 되어 결국 류현진은 시즌 9승 9패로 두자리 수 승리에 실패해 데뷔 이래 처음으로 10승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최하위를 전전하는 팀 사정에도 불구하고 많은 메이저 리그 구단 스카우트들이 류현진의 선발 등판 경기를 보기 위해 매경기를 방문했다. 비록 류현진은 통산 100승, 시즌 10승을 달성하지 못한채로 2012 시즌을 마감했지만 6년 만에 200K대의 탈삼진왕이 되었고 최동원, 선동열에 이어 시즌 200탈삼진 이상을 2번 이상 달성한 선수가 되었다.

시즌 이후에는 구단의 동의하에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 리그 진출을 시도했다. 11월 9일 메이저 리그 포스팅 시스템 기간이 종료된 결과 2573만7737달러33센트(한화 약 279억8978만원)의 포스팅 응찰액을 받았으며[11] 최고 금액 입찰팀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밝혀졌다.[12] 12월 10일,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의 협상 끝에 계약 기간 6년 동안 총액 3600만달러(한화 약 408억원)를 받는 조건으로 계약하였다.

메이저 리그 시절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시절
2013년 메이저 리그 데뷔 첫해 14승 8패 평균자책점 3.00이라는 좋은 성적을 기록하면서 성공적인 메이저 리그 데뷔시즌을 보냈다. 특히 내셔널리그 챔피언 결정전 3차전에서는 7이닝을 3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한국인 최초로 포스트시즌 승리투수가 된다. 한국프로야구에서 메이저 리그로 직행한 최초의 한국인 선수라는 특수성 때문에 류현진은 전 국민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류현진이 선발등판한 모든 경기가 MBC 공중파로 생중계 되었고 시청률도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류현진은 전국적으로 굉장히 많은 인기를 얻게 되었다. 시즌이 끝나고 한국에 귀국한 후에는 인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수많은 CF를 찍었는데 CF수익만 40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13]

2014년 시즌 초반 어깨부상으로 15일짜리 부상자 명단에 들었지만 복귀 이후 투수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쿠어스 필드에서 콜로라도 록키스한테 승리를 거두기도 하는 등, 승수를 쌓아나갔다. 이 때부터 류현진, 클레이튼 커쇼, 잭 그레인키를 필두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가 연승을 거두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게 빼앗겼던 NL 서부 지구 1위를 되찾고 승차를 벌려나간다. 하지만 류현진은 8월 14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엉덩이 부상을 당하며 이틀 후인 8월 16일에 다시 15일짜리 부상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9월 1일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복귀전에서 7이닝 4피안타 7삼진 1실점으로 시즌 14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2주 후인 9월 13일 샌프란시스코전에 등판하여 1이닝 5피안타 1탈삼진 4실점으로 메이저 리그 데뷔 이래 최악의 투구를 했다. 이 때 3번타자 버스터 포지와 상대하던 중 어깨 통증이 재발해 이러한 사태가 일어났다. 다행히 염증으로 끝나 DL에는 오르지 않았다. 디비전 시리즈에서는 카디널스를 상대로 6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다저스는 1승3패로 탈락하며 시즌을 마쳤다.

2015년 시범경기 도중 어깨에 통증을 느꼈고, 정밀검진 결과 특별한 사항이 나오지 않았으나 통증과 구속저하는 여전했고 60일 DL에까지 올랐으나 같은 해 5월 22일 어깨 관절와순 파열 진단을 받았다. 결국 수술을 받으며 시즌 아웃 되었다.

2016년 1월 8일 마에다 겐타가 LA 다저스에 입단하면서, 마에다 겐타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2018년 팔꿈치 수술에서 복귀한 후, 5월에 다시 허벅지 부상으로 이탈하였으나, 3개월 후 다시 복귀하였고 7승 3패 평균자책점 1.97이라는 빼어난 기록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2018년 10월 25일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하여 한국인 최초 월드 시리즈 2차전에 선발 등판하였다.

특징
제구력, 구위, 운영능력, 체력을 모두 갖춘 선발 투수로 평가받고 있다.[14] 직구 평균 구속은 145 km 정도이고 최고 구속은 2007년 8월 31일 잠실 LG전에서 기록한 154km이다.[15] 동산고등학교 시절 커브와 직구가 주 무기였지만 프로 첫 해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청주야구장에서 난타당한 이후에는 구대성 선수에게 서클 체인지업을 전수받았다. 류현진의 서클체인지업은 직구를 던질 때와 같은 투구 폼에다가 팔스윙도 빠르기 때문에 타자들이 현혹되기 쉬워 류현진의 대표구종으로 자리잡았다. 메이저 리그에서도 류의 체인지업은 평가가 높은데 2013년 메이저 리그 감독들이 선정한 부문별 앙케이트 조사에서 류현진의 체인지업은 내셔널리그 2위에 선정되었다.[16]2007년에는 한용덕 코치와 함께 슬라이더 구종 개발에 힘써서 130 km 초반의 슬라이더를 추가했다.[17]
좌투수지만 공을 던질 때 외에는 모두 오른손잡이로 생활하므로[18] 야구선수 중에서는 좀처럼 찾기 힘든 좌투우타이다.[19] 투수뿐 아니라 타자로서의 재능도 워낙 뛰어나서 동산고 시절에는 에이스겸 4번타자로 활약했다.[20]
한국에서 인기가 매우 많아 2013년 갤럽조사에서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메이저 리그 스포츠 스타 1위에 선정되었다.[21]
류현진은 타자를 압도하는 피칭으로 괴물(코리안 몬스터)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육중한 몸매로 류뚱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22] 류현진은 방송을 통해 메이저 리그 야구팬들이 "류뚱"이나 "코리안 몬스터"로 불러주기를 바란다고 했다.[22]
류현진 재단을 운영하여 여러 곳에 기부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4년 4월에는 세월호 침몰 사고 희생자들을 위해 1억원을 기부하였고, 클럽하우스 라커에 세월호 생존자 구출을 기원하는 표현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류현진거리 표지판
'류현진 거리'는 자신의 모교인 인천 동산고등학교 주변에 자신의 이름을 딴 길을 갖고 있다. 인천시 동구는 지난 2016년 류현진의 모교인 인천 동산고 인근에 '류현진 거리'를 조성했다. 메이저 리그 스포츠 스타 류현진이 인천 동산고 졸업생이란 점에 착안하여, 인천 동산고 주변에 류현진 캐릭터 동상은 물론, 류현진 친필 사인과 유니폼, 야구공 등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국가대표 성적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
2006년 12월 2일 일본 전 : 패전 투수(선발 투수), 2⅓이닝, 6피안타, 4볼넷, 5실점

2006년 12월 6일 중국 전 : 선발 투수, 4이닝, 3피안타, 3탈삼진, 2실점

2007년 아시아 선수권 예선전
2007년 12월 1일 대만 전 : 승리 투수(선발 투수), 5이닝, 4피안타, 4탈삼진, 2실점

타이틀
KBO
탈삼진왕 : 5회 (2006년, 2007년, 2009년, 2010년, 2012년)
평균자책점왕 : 2회 (2006년, 2010년)
다승왕 : 1회 (2006년)
트리플 크라운 : 1회 (2006년)
MVP : 1회 (2006년)
골든 글러브 : 2회 (2006년, 2010년)
신인왕 (2006년)
국제대회
올림픽 금메달 : 1회 (2008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 1회 (2010년)
주요 기록
KBO
최소경기 시즌 100탈삼진 : 12경기 (2006년)
최연소 시즌 100탈삼진 : 만 19세 2개월 (2006년)
최소경기 통산 1000탈삼진 : 153경기 (2011년)
최연소 통산 1000탈삼진 : 만 24세 2개월 (2011년)
한경기 정규이닝 최다 탈삼진 : 17개 (2010년 5월11일 청주 LG전)
신인 데뷔전 탈삼진 타이기록 : 10탈삼진 (2006년 4월 12일 잠실 LG전)
신인 시즌 최다승 타이기록 : 18승 (2006년)
최연소 시즌 200이닝・최연소 시즌 200탈삼진 : 20세 (2006년)
한국 프로 야구 최초 신인왕과 MVP 동시 수상 (2006년)
29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 비공식 세계신기록 달성 (2009년 8월19일 ~ 2010년 8월17일)
MLB
다저스 역대 신인 최다 퀄리티 스타트 : 22회 (2013년)
역대 한국인 시즌 최우수 평균자책점 : 3.00 (2013년)
한국인 최초 포스트시즌 승리투수 (2013년)
한국인 최초 메이저리그 올스타전 선발투수 (2019년)
등번호
KBO
15 (2006년, 한화 이글스)
99 (2006년 ~ 현재(임시 결번), 한화 이글스)
MLB
99 (2013년 ~ 현재,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학력
인천창영초등학교 (졸업)
동산중학교 (졸업)
동산고등학교 (졸업)
대전대학교 (학사)
연봉
2006년 2천만원 / 계약금 2억 5000만원[25]
2007년 1억원 (2년차 최고 연봉 기록, 역대 최고 인상률 400%)[26]
2008년 1억 8천만원 (3년차 최고 연봉 기록)[27]
2009년 2억 4천만원 (4년차 최고 연봉 기록)[28]
2010년 2억 7천만원 (5년차 최고 연봉 기록)[29]
2011년 4억원 (6년차 최고 연봉 기록)[30]
2012년 4억 3천만원 (7년차 최고 연봉 기록)[31]
2013년 보장 250만 달러, 옵션포함 350만 달러
2014년 보장 350만 달러, 옵션포함 450만 달러
2015년 보장 400만 달러, 옵션포함 500만 달러
2016년 ~ 2018년 보장 700만 달러, 옵션포함 800만 달러[32]
2019년 퀄리파잉 오퍼 1790만 달러
가족
2018년 1월 5일 호텔신라에서 동갑내기인 배지현 아나운서와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방송
《롤링스타즈》 (KBS) - 시청자 퀴즈 (2009년)
《인사이드 스포츠》 〈스타초대석〉 (2006년 11월 6일, KBS N Sports)
《해피쿡》 (2008년 10월 28일, 11월 4일, CMB) - 김태균과 함께 출연.
《이만기의 샅바 인터뷰》 (2008년 12월 20일, KBS N Sports)
《스타 골든벨》 (2009년 11월 7일, KBS 예능 제작국) - 김주찬, 황재균, 김현수와 함께 출연.
《2009 야생야사》 (2009년 11월 7일, KBS N Sports)
《우리는 전설이다》 (2010년 10월 21일, SBS SPORTS)
《야구 읽어주는 남자》 (2010년 10월 25일, MBC) - 박정권, 임태훈과 함께 출연.
《2010 야생야사》 (2010년 12월 25일, KBS N Sports)
《스포츠 타임》 〈스타 집중 인터뷰〉 (2011년 1월 6일, KBS)
《런닝맨 〈초능력 야구〉 (2012년 11월 11일, SBS) - 추신수와 함께 출연
《무릎팍 도사》 (2012년 12월 27일, MBC)
《런닝맨》(2013년 11월 24일, SBS) - 수지, 이병규, 김현수, 신경현 과 함께 출연
《런닝맨》(2014년 12월 28일, SBS) - 강정호와 함께 출연
《슈퍼맨이 돌아왔다》 (2015년 1월 11일, KBS 예능 제작국)
CF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 그린스포츠 (2010년)
《팔도》 왕뚜껑 (2010년)
《CJ E&M》 넷마블 (2013년)
《LG유플러스》 유플러스 LTE (2013년)
《오뚜기》 진라면 (2013년) - 2편은 김인식감독 3편은 김희애와 공동출연
《NH농협은행》(2013년)
《BBQ》(2013년)
《시원스쿨》(2014년) - 이시원강사, 유재석과 공동출연
음반
SMILE AGAIN (2013년) - 트러블 메이커, G.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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زياد علي

زياد علي محمد